AI가 제품을 싸게 만들수록, 제품 밖의 해자가 비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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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제품을 싸게 만들수록, 제품 밖의 해자가 비싸진다

좋은 제품을 만들면 고객이 따라온다는 믿음은 오랫동안 창업의 기본 문법이었다. 먼저 제품을 만들고, 제품시장적합성(PMF)을 찾고, 그다음 마케팅과 영업으로 확장한다. GTM은 제품이 맞다는 사실이 확인된 뒤 켜는 가속 장치였다.

AI는 이 순서를 흔들고 있다. 제품을 만드는 비용만 낮춘 것이 아니라, 잘 팔리는 제품을 따라 만드는 비용까지 낮췄기 때문이다. 기능 하나가 시장의 차이를 만들던 시간은 짧아졌고, 경쟁사가 비슷한 기능을 내놓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함께 줄었다. 이제 먼저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얻는 여유가 오래가지 않는다.

AI가 제품을 싸게 만들수록, 제품 밖의 해자가 비싸진다.

GTMfund의 The Distribution Era는 이 변화를 소프트웨어 해자의 이동으로 설명한다. 한때는 막대한 자본과 기술이 진입장벽이었다. 클라우드는 배포 비용을 낮췄고, SaaS는 판매 방식을 바꿨으며, 제품 주도 성장(PLG)은 제품 자체를 유입 경로로 만들었다. 이제 AI가 제작과 복제의 비용을 낮추면서 희소성은 제품에서 독자, 신뢰, 카테고리로 이동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핵심은 “마케팅이 더 중요해졌다”가 아니다. 제품과 시장의 관계를 만드는 순서가 바뀌었다는 데 있다.

제품을 만든 뒤 시장을 찾는 순서가 위험해졌다

제품부터 만드는 회사는 두 개의 가설에 동시에 돈을 건다. 이 문제가 실제로 중요한가. 그리고 우리가 만든 방식이 그 문제를 풀기에 적합한가. 제품이 완성된 뒤 고객을 찾으면 두 가설이 틀렸다는 사실도 늦게 배운다.

반면 독자와 신뢰를 먼저 쌓는 회사는 제품 없이도 시장을 배울 수 있다. 어떤 문제가 반복해서 읽히는지, 어떤 표현에 사람들이 자기 경험을 보태는지, 무엇을 해결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는지 관찰한다. 글은 단순한 홍보물이 아니라 문제를 명명하는 도구가 되고, 독자의 반응은 수요에 대한 초기 증거가 된다.

HubSpot이 소프트웨어 기능만 판 것이 아니라 ‘인바운드 마케팅’이라는 언어와 교육 체계를 만든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회사는 이미 존재하던 수요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이해하는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제품은 그 카테고리 안에서 자연스러운 실행 수단이 됐다.

이 순서에서는 GTM이 PMF 이후에 시작되지 않는다. 어떤 독자가 모이는지, 그들이 어떤 문제를 반복해서 말하는지, 어떤 약속에 반응하는지 확인하는 과정 자체가 PMF를 만든다. 제품이 출시된 뒤에도 같은 관계가 새로운 요구와 이탈 신호를 계속 돌려주므로 PMF를 유지하는 장치가 된다.

유통은 광고 슬롯이 아니라 축적된 관계다

여기서 유통을 광고비나 팔로어 수로 이해하면 논지가 얕아진다. 돈을 내면 빌릴 수 있는 도달 범위는 자산이지만 해자는 아니다. 경쟁사도 같은 경매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복제하기 어려운 유통은 누군가의 다음 판단에 반복해서 호출되는 관계다. 특정 문제를 이해하고 싶을 때 먼저 읽는 글, 새로운 도구를 고를 때 참고하는 기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제품도 시험해볼 만큼 쌓인 신뢰가 여기에 속한다. 독자는 단지 메시지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의 언어와 제품의 방향을 함께 만드는 시장의 일부가 된다.

그래서 독자 우선 전략은 출시 전에 이메일 목록을 많이 모으자는 전술과 다르다. 먼저 하나의 문제 영역을 오래 탐구하고, 그 안에서 신뢰할 만한 해석자나 실천자가 되는 전략이다. 제품이 나오기 전에 카테고리와 판단 기준을 만들고, 제품은 이미 형성된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이 구조가 강한 이유는 코드보다 느리게 쌓이기 때문이다. 기능은 며칠 만에 모방할 수 있어도, 수년 동안 축적된 설명, 사례, 독자의 답장, 실패의 기록, 반복 구매의 신뢰를 한 번에 복제하기는 어렵다. AI가 생산 시간을 압축할수록 시간으로만 살 수 있는 자산의 상대 가격은 올라간다.

그러나 유통이 유일한 해자는 아니다

The Distribution Era는 유통을 오늘의 해자로 강하게 밀어붙인다. 방향은 맞지만 “유일한 내구적 경로”라는 표현은 과장에 가깝다. 제품 내부의 모든 해자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경쟁사가 접근할 수 없는 독점 데이터는 모델과 결과를 다르게 만든다. 업무의 핵심 기록과 승인 절차에 깊이 들어간 제품은 교체 비용을 만든다. 사용자가 늘수록 공급과 정보가 좋아지는 네트워크는 여전히 강하다. 규제 승인, 물리 인프라, 브랜드의 안전성처럼 코드 생성만으로 넘을 수 없는 장벽도 남아 있다.

더 정확한 결론은 유통이 다른 해자를 대체했다는 것이 아니다. 제품 기능 하나만으로 해자를 설명하기 어려워졌고, 강한 회사는 제품 밖의 관계와 제품 안의 축적을 연결한다는 것이다. 독자와 신뢰가 사용자를 데려오고, 사용 과정에서 데이터와 워크플로가 쌓이며, 그 결과가 다시 더 좋은 이야기와 추천을 만든다.

그 연결을 만들려면 독자를 모은 다음 아무 제품이나 투입해서는 안 된다. 글과 제품 사이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를 더 엄격하게 봐야 한다.

글과 제품 사이에는 반복되는 문제와 유료 검증이 있어야 한다. 독자의 관심은 출발점이지 구매 증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많이 읽힌 글이 곧 좋은 소프트웨어 아이디어라는 보장은 없다. 사람은 흥미로운 설명에는 시간을 쓰지만, 해결이 절실한 문제에만 돈과 업무 방식을 건다.

독자가 먼저라는 말은 제품을 늦게 만들라는 뜻이 아니다

독자 우선 전략을 콘텐츠를 충분히 쌓을 때까지 제품 개발을 미루는 방식으로 이해하면 또 다른 함정에 빠진다. 제작 비용이 낮아진 시대에는 작은 도구를 빨리 만드는 일이 오히려 합리적이다. 중요한 것은 제품을 만드는 시점이 아니라 무엇을 근거로 만드는가다.

글에서 반복해서 드러난 문제를 사람이 직접 해결해보고, 누군가 그 해결에 돈을 내며, 해결 과정의 같은 부분이 계속 반복될 때 소프트웨어가 들어갈 자리가 생긴다. 이 순서를 따르면 제품은 창업자의 상상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미 작동하는 관계와 거래에서 잘라낸 반복 작업으로 나온다.

콘텐츠는 문제의 언어를 시험한다. 대화와 서비스는 고통의 강도와 지불 의사를 시험한다. 소프트웨어는 반복되는 해결을 압축한다. GTM은 이 셋을 잇는 피드백 루프다.

쓴다 → 반응을 본다 → 직접 해결한다 → 돈이 오가는지 확인한다 → 반복되는 부분만 제품으로 만든다 → 결과를 다시 쓴다.

이 루프에서 PMF는 한 번 발견하고 졸업하는 상태가 아니다. 시장의 문제, 제품의 약속, 고객에게 도달하는 방식이 계속 맞물리는 동적 관계다. 독자의 질문이 바뀌면 시장이 움직였다는 신호이고, 사용자의 행동이 바뀌면 제품의 가치가 달라졌다는 신호다. GTM은 그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하는 감각기관이 된다.

카테고리를 가진 회사는 비교 기준을 가진다

독자와 신뢰를 먼저 쌓는 전략의 가장 큰 효과는 잠재고객 수보다 비교 기준에 있다. 시장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만든 회사는 고객이 제품을 평가하는 질문에도 영향을 준다.

HubSpot이 ‘인바운드’를 설명할수록 기업은 마케팅 자동화 도구를 기능 수만으로 비교하지 않게 됐다. 콘텐츠, 검색, 리드 육성을 하나의 운영 방식으로 보기 시작했다. HubSpot은 그 운영 방식을 실행하는 대표 제품이 됐다. 카테고리를 만든다는 것은 이름을 먼저 붙이는 행위가 아니라, 무엇이 좋은 해결책인지 평가하는 기준을 배포하는 일이다.

이 힘은 AI 시대에 더 커진다. 비슷한 기능을 가진 제품이 빠르게 늘어날수록 고객은 모든 제품을 직접 비교할 수 없다. 익숙한 카테고리, 신뢰하는 해석자, 이미 배운 판단 기준을 통해 선택을 압축한다. 제품이 복제될수록 선택을 돕는 설명의 가치가 커진다.

하지만 카테고리만 만들고 제품이 약하면 신뢰는 오래가지 않는다. 유통은 나쁜 제품을 영구히 구하는 마법이 아니다. 첫 구매를 앞당길 수는 있어도 반복 사용과 추천을 대신하지 못한다. 강한 유통은 제품 품질의 대체재가 아니라 더 빠르고 더 냉정한 검증 장치다. 약속과 실제 결과의 차이가 기존 독자에게 곧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장 강한 해자는 순환한다

유통, 독점 데이터, 워크플로 잠금, 네트워크 효과를 서로 경쟁하는 후보처럼 볼 필요는 없다. 실제로 강한 사업에서는 하나가 다음 것을 만든다.

신뢰받는 콘텐츠가 첫 사용자를 데려온다. 사용자는 제품 안에서 고유한 데이터와 작업 맥락을 만든다. 제품이 핵심 업무에 들어가면 전환비용이 생긴다. 더 많은 사용과 사례는 제품을 개선하고, 그 결과는 다시 더 설득력 있는 콘텐츠와 추천이 된다. 유통이 제품 사용을 만들고, 제품 사용이 새로운 해자를 만들며, 그 해자가 다시 유통을 강화한다.

반대로 이 순환이 없으면 각각은 쉽게 약해진다. 독자만 있고 유료 문제를 찾지 못하면 미디어는 관심을 수익으로 바꾸지 못한다. 제품만 있고 관계가 없으면 기능 경쟁과 광고 경매에 갇힌다. 데이터가 있어도 고객 결과를 개선하지 못하면 저장 비용일 뿐이다. 워크플로 잠금이 가치보다 불편에 기대면 고객은 탈출할 기회만 기다린다.

따라서 AI 시대의 해자는 하나의 물건이 아니라 학습 속도의 구조에 가깝다. 누가 더 많은 신뢰를 얻고, 더 빨리 실제 문제를 발견하며, 더 작은 제품으로 검증하고, 사용 결과를 다시 시장의 언어로 돌려보내는가. 이 순환은 개별 기능보다 복제하기 어렵다.

Zero Draft Lab이 글부터 시작하는 이유

Zero Draft Lab이 먼저 글과 독자를 쌓고 나중에 소프트웨어를 붙이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글은 완성된 제품을 알리는 채널이 아니라 어떤 문제가 반복되고 어떤 언어가 사람의 판단을 바꾸는지 확인하는 연구 표면이다.

다만 글에서 곧장 앱으로 점프해서는 안 된다. 독자의 반응 중 실제 업무의 고통으로 이어지는 것을 고르고, 먼저 수작업으로 해결하며, 유료 거래가 생기고, 같은 해결이 반복될 때만 소프트웨어로 압축해야 한다. 그래야 제품은 콘텐츠 사업 옆에 붙인 장식이 아니라 축적된 시장 이해의 결과가 된다.

이때 ZDL의 자산은 글의 개수만이 아니다. 문제를 설명하는 언어, 어떤 주장에 독자가 반응했는지에 대한 기록, 실제 적용에서 나온 반례, 유료로 해결한 과정, 제품 사용 데이터가 함께 쌓인다. 경쟁자는 화면과 기능을 복제할 수 있어도 이 전체 계보를 한 번에 가져갈 수 없다.

The Distribution Era의 가장 쓸모 있는 통찰은 “제품보다 마케팅이 중요하다”는 구호가 아니다. 제품을 만들기 전에 시장과 관계를 맺고, 제품을 만든 뒤에도 그 관계로 PMF를 계속 갱신해야 한다는 운영 원리다.

AI는 제품을 만드는 사람을 크게 늘린다. 그래서 제품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제품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회사가 강해진다. 앞으로 비싸지는 것은 코드가 아니라 신뢰를 얻는 시간, 문제를 명명하는 언어, 실제 사용에서 쌓인 맥락,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다음 제품으로 연결하는 순환이다.

AI가 제품을 싸게 만들수록, 승자는 제품을 가장 빨리 만든 회사가 아니라 시장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가장 오래, 가장 가까이서 배운 회사가 된다.


주요 출처: Max Altschuler·Paul Irving, The Distribution Era. 소프트웨어 해자의 시대별 이동, audience-first, GTM이 PMF를 만들고 유지한다는 논지는 해당 글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유통을 유일한 해자로 보지 않고 독점 데이터, 워크플로 전환비용, 네트워크 효과, 규제 장벽과 결합된 순환 구조로 해석한 부분과 Zero Draft Lab에 대한 적용은 이 글의 분석입니다.